- 입력 2017.03.06 09:54
겨울 숲에 가면 다른 계절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원래 있었던 것인데 화려한 꽃과 무성한 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들이 다 사라진 이제야 얼굴을 내밀며 ‘나 여기 있소’ 한다. 특히 굴피나무 열매가 그렇다. 여름부터 생겨 색깔만 변했을 뿐, 모양 그대로 가을을 넘기고 겨울이 돼서야 줄기에 홀로 오롯이 남아 아는 척을 한다.
굴피나무를 처음 본 것은 문수산(처인구 원삼면)이다. 정확히 하자면 나무가 아니라 바닥에 떨어져있던 열매와의 만남으로. 처음 봤을 때부터 완전히 매료됐다. 솔방울처럼 딱딱한 목질로 이뤄져있는데 정면으로 바라보면 타원의 길쭉함이 가운데를 향해 마치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러스트같은 것이 한 송이 꽃을 보듯 수학적으로 또, 조형적으로 아름다움이 넘쳤다. 완벽한 자연의 디자인을 보는 듯했다.
강렬한 열매와의 첫 만남이었건만, 다른 계절에는 굴피나무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다른 나무들에 정신 팔려 옆에 있어도 모르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다가 여름휴가로 서해안의 웅도 근처 무인도 해변을 가게 됐고, 그 곳에서 처음으로 굴피나무의 연두색 열매를 봤다. 처음 봤던 갈색 열매와 같은 모양인데 연두색을 띈 것이 더 연해보이고 부드러워보였다. 용인의 문수산과 서해안 무인도에서 같은 나무를 보다니 신기했다. 그 후로 용인에서, 남해의 숲에서, 전국에서 굴피나무 열매를 만나는 건 숲을 찾는 즐거움 중 하나가 됐다.
굴피나무는 우리나라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은 물론이고 섬까지 널리 살고 있는데, 남쪽 지역으로 갈수록 많은 숫자의 굴피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햇빛을 좋아해 숲 가장자리나 산기슭, 산 중턱에 모여 산다.
9~10월에 작은 솔방울만한 열매가 검은 갈색으로 여무는데 다 익으면 뾰족한 피침 모양의 열매조각이 벌어져, 가장자리가 납작한 날개가 달린 씨앗이 나와 가까운 곳으로 날아간다. 씨앗이 날아가도 열매는 남아 이듬해 봄, 여름까지 가지에 매달려 있기도 한다.
굴피나무는 가래나무와 잎이 비슷하다. 가래나무는 또 호두나무와 열매가 비슷하다. 그래서 굴피나무와 가래나무, 호두나무가 한 가족을 이룬다. 분류상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가래나무과 나무들이다. 이외에 중국에서 들어온 중국굴피나무도 간혹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호두나무와 중국굴피나무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나무로 산과 들에 자생하지 않고 심어 기른 반면, 굴피나무와 가래나무는 자연스레 스스로 우리 산기슭에서 자란다.
굴피나무는 쓰임새가 많은 나무이다. 나무껍질은 질기고 물에 잘 썩지 않아 끈을 만드는데 쓰이며 그 끈으로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래서 ‘그물피나무’라고 부르던 것이 ‘그울피’, ‘굴피나무’가 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나무껍질과 잎에는 독성을 띄는 물질이 들어 있어 그것을 빻아 물에 풀면 물고기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둥둥 떠올랐다고 한다. 굴피나무 껍질로 만든 그물을 던지고 잎을 빻아 물에 풀면 참 쉽게 고기를 잡았으리라 생각되니 올해 여름엔 냇가에 가서 흉내라도 내볼까 한다.
또한 나무속의 색과 무늬가 아름다워 가구를 만들고 성냥개비도 만들고, 조선시대에는 목재로 임금님의 관을 제작한 기록도 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굴피나무다. 시대가 변해 요즘은 가는 줄기를 잘라 컵받침이나 캔들받침으로도 쓴다. 겉껍질과 속껍질 그리고 심재의 색깔이 다르고 나이테도 치밀해 무늬가 아름다워 딱이다. 마치 코바늘뜨기 한 레이스 작품 같다. 열매는 황갈색 물을 들이는 염료로 이용되는데 매염제에 따라 색이 달라져 알루미늄으로 황토색, 동으로 고동색, 철로 흑갈색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쓰임새가 다양한 굴피나무는 이름 때문에 흔히 굴피집을 만드는 재료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굴피집의 ‘굴피’는 도토리가 달리는 굴참나무 껍질을 지붕에 얹어 만든 전통가옥이고 이와 비슷한 너와집은 지붕에 얇은 소나무 널빤지를 얼기설기 깔아놓은 집을 말한다.
열매만 예쁜 줄 알았는데 우리와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만나고 있었다니 굴피나무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졌다. 굴피나무 꽃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며 핀다. 노란색 꽃이 핀다는데 올해는 꼭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봐야겠다. 그때쯤 굴피나무의 꽃소식을 전하며 못다 한 굴피나무 이야기를 풀어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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