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7.02.09 09:39
초등학교 시절, 학교와 집까지 어린 아이 걸음으로 족히 한 시간은 되는 거리에 살고 있었다. 바쁜 아침엔 버스를 타고 갔고 한가하고 뭔가 재밌는 꺼리를 찾는 오후 시간엔 걸어서 집에 오곤 했다. 학교와 집은 도심 한 가운데 있었기에 집에 가는 길은 심심하지 않았다. 형형색색으로 모양과 크기도 다양한 글자가 써 있는 간판 읽는 재미에 푹 빠져 그 길이 멀어 보이지 않았다. 행여나 간판이 바뀌거나 하면 ‘틀린 그림 찾기’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았다. 간판 읽기가 지루해질 때쯤이면 고개를 돌렸다. 간판은 가는 길 오른쪽에 있고, 왼쪽엔 플라타너스가 있었다. 끝도 없이 죽 이어진 플라타너스나무는 거대한 거인들이 마치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며 지켜주는 듯 서있었다. 어느 날은 말을 걸기도 하고 장난을 걸어오기도 했다. ‘얘,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있나보네. 뭔데?’, ‘무슨 일 있어? 시무룩해 보인다. 나에게 털어나 봐’ 그러면 여자아이는 주저리주저리 쏟아놓곤 했다. 플라타너스는 든든한 수호신이자 좋은 길동무였다. 그래서 그 한 시간의 거리가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플라타너스. 외국의 어느 철학자가 연상되는 이름인 이 나무의 이름은 우리말로 ‘버즘나무’라고 한다. 플라타너스나무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껍질들이 벗겨져 얼룩덜룩 무늬를 갖고 있는 나무줄기다. 마치 군복처럼 초록계열로 채도를 달리하며 여러 색깔들이 어우러져있다. 이것을 보고 얼굴에 버즘이 필 때처럼 얼룩져 보인다 해서 버즘나무라고 불렀다. 버즘은 피부가 좋지 않아 생기는 버짐의 사투리로 나무 입장에서 보면 가히 기분 좋을 이름은 아닌 것 같다.
버즘나무는 암수딴그루로 암꽃이 피는 암나무와 수꽃이 피는 수나무가 따로 있다. 암꽃은 작은 붉은 꽃들이 여러 개 모여 동그란 모양을 갖는데 꽃이 지고 나면 딱딱하게 여물어 탁구공만한 열매가 된다. 이 열매의 모습을 보며 어느 지역에서는 방울나무라고 부른다. 버즘나무와 방울나무, 같은 나무를 보고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이름이 달라진다.
동그랗게 달리는 방울은 표면이 오톨도톨하다. 그 오톨도톨한 것들이 하나하나 씨앗들이다. 잘 여문 열매는 겨우내 가지에 잘 달려 있다가 따듯한 어느 봄날 열매 한 쪽이 푹하고 터져 나온다. 김밥 옆구리 터지듯이, 부들열매가 터지듯이 터진 씨앗들이 하나하나 날개를 달고 자기의 세계로 날아간다.
버즘나무보단 플라타너스가 더 유명하듯이, 외국에서 들어온 나무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나무다. 이 나무는 넓은 잎으로 유명하다. 잎 뒤에는 노란 털이 많이 나있어 이 털들이 도심의 먼지와 공해물질들을 잡아준다고 한다. 그래서 가로수로 많이 심었다. 그렇게 심은 가로수들이 자라자 이젠 주변 건물들, 드리워진 전선들과 맞닿는 것이 문제가 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뚝뚝 잘랐다.
매년 겨울이나 이른 봄이면 나무는 기이한 괴물의 형상을 가지게 됐다. 그러한 모습으로도 따듯한 봄이 오면 신기하게도 새 잎이 나오고 새 가지가 나온다. 그렇게 새 잎으로 덮여야 비로소 흉측한 모습이 가려진다. 찬란했던 여름 가을이 지나면 다시 가지치기의 시기가 다가오고, 그걸 매년 바라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슬프다. 그렇게라도 가까이에 잡아두고 싶은 인간의 이기심이 괴롭지만 나무는 아무 말 않고 옆에 서있다. 살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버즘나무를 쉽게 볼 수 있는 장소는 길가 외에도 초등학교와 같은 학교 교정이다. 잘 자라고 그늘을 넓게 만들어줘 그 아래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어서일까? 옛날 훌륭한 교육자들의 가르침이 나무 아래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공자는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건넸고,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유명한 서양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의 용인초등학교에는 학교 역사만큼 오래된 버즘나무가 있다. 오랜 세월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게 그리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나무 아래에서 친구들과 놀고 꿈을 키웠던 동문들 덕분에 아직도 굳건히 서있는 나무가 참 아름답다. 나무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추억을 주고 지혜를 준다.
원삼면에 살면서 멀리 있는 친구들이 찾아오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집 참 멀다. 근데 너무 멋지다. 동네 들어오는 입구에 플라타너스 길이 쫙 펼쳐지는데 동화 같았다. 넌 참 좋겠다.” 동화 같은 플라타너스길이 오는 길에 쌓인 피로를 확 풀어 줄만큼 매력적이란다. 그래서 꼭 그 길로 오라고 안내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 > 나무칼럼-용인시민신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매만 예쁜 줄 알았더니 다재다능하네, 굴피나무 (0) | 2021.07.13 |
---|---|
물을 좋아하는 단단한 나무, ‘물박달나무’ (0) | 2021.07.10 |
열매를 보고 알았네 ‘노박덩굴’ (0) | 2021.07.10 |
해피 크리스마스! 하늘 가까이에 사는 우리 나무 ‘구상나무’ (0) | 2017.06.08 |
바위산 꼭대기에서 만난 팥배나무 (0) | 2016.12.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