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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서 하는 일/안성사람들-안성신문

쌀 씻는 남자 김용의

by 늘품산벗 2008. 9. 3.

"덕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쌀 씻는 남자 김용의
신승희 시민기자

 
한국인의 주식인 쌀. 아무리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외식이 잦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하루에 한끼 이상은 밥을

먹는다. 밥을 하기 위해 주부들은, 어머니는 쌀을 씻는다. 그런데 무심코 싱크대에 흘려버렸던 쌀뜨물이

오히려 그 안의 풍부한 영양소로 인해 물의 부영양화를 일으키는 큰 오염원이 된다.
 
쌀뜨물 1리터를 정화시키는 데 600리터의 깨끗한 물이 필요하다. 된장국 끓일 때 더 구수하고 깊은 맛을 나게

하는 재료로, 미백효과가 있어 세수할 때 이용하는 고마운 쌀뜨물이 수질오염의 주범이란 애물단지로 여겨지

는 안타까운 현실에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쌀뜨물이 미생물을 만나 발효과정을 통해 수질오염원이란 불명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생활지킴이로 거듭

나고 있단다. 안성에 쌀뜨물 발효액을 만드는 곳이 있다고 하여 찾아가보았다.

안성시 서운면 3공단에 자리하고 있는 쌀 가공공장이 있다. '씻어 나온 쌀'이 주력 상품이다.  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김용의 씨를 만났다.
 

▶ 김용의 씨.  그는 친환경 농법이 아무리 좋다 해도 자신이 환경적으로 생각해야 접목시킬 수 있는 것이라 말했다. 그만큼 더디고 힘들다 하더라도 환경적인 실천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일 게다.   © 안성신문


 
어떻게 쌀뜨물 발효액을 만들게 되었나요?

"이곳은 씻어 나온 쌀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쌀을 씻는 과정에서 생기는 쌀뜨물을 예전엔 폐수처리로 정수를

해서 수질요건에 맞게 방류했으나 현재는 자원화로 개발하여 친환경 미생물제재의 중요한 원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김치, 막걸리, 된장 등 대표적인 우리 전통 발효식품의 유래균주로 쌀뜨물을 발효시키면 각종 아미

노산, 유기산 및 항산화물질 등이 다량 생성되며, 발효액은 오염원이 아닌 정화원으로 변하게 되어 쌀뜨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유용성이 더 효과적으로 발휘됩니다."
 
쌀뜨물 발효액은 쓰임새가 많다던데요?

"가정에서 청소할 때나 소독할 때, 설거지할 때나 세탁할 때도 사용할 수 있고 화초나 농작물재배에도 활용이

가능합니다. 산성비로 인한 오염, 농약과 화학비료 등의 사용으로 흙에 사는 미생물이 적어져 흙 속에 포함되

어 있는 유기물을 분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뿌리는 뿌리대로 유기물은 유기물대로 겉돌게 돼버리지요. 미생

물을 활성화하여 땅의 힘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농가들은 써보면 좋다고 인정은 하는데 귀찮아서 아직 많이

보급되지는 않는 실정입니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로 쉽게 농사지려는 사람이 더 많지요.
 
친환경 농법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자신이 환경적으로 생각해야 접목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안성을

비롯해 입장, 천안, 성환 등 여러 지역에 보급하고 있습니다. 포도, 배, 장미, 토마토, 딸기, 오이 등의 작물재

배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안성마춤쌀과 협의중입니다. 미생물제재와 접목시켜 특색화할 예정입니다."

쌀뜨물 발효액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김용의 씨와 얘기하다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에도 이미 사용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회사에서도 농축된 발효액을 원료로 제공하여 비누나 선크림 등도 만들어내고

 있다. 
 
원래 환경 쪽에 관심이 많았나요?

"옛날에 선교사가 되기 위해 2년 반 정도 공부를 하며 기독교 선교단체 활동을 했습니다. 그 중에 환경에 대한

사업분야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지렁이 사업을 했지요. 지렁이를 통한 음식물 쓰레기 처리방법을 연구했습니

다. 지렁이가 음식물 쓰레기를 분해하고 먹어서 변으로 나오면 더이상 쓰레기가 아닙니다. 흙의 좋은 양분이

됩니다. 친환경 자연화 사업이지만 투자비용이 많이 들고 제도의 후속조치가 미흡해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행정적인 사항이 뒤따라오질 못하더군요."
 
김용의 씨는 강화에서 나고 자랐다. 강화에 서너 번 가본 적이 있는 기자의 아는 척에 대해 
"강화에는 관광지로 많이 알려진 것말고도 좋은 곳이 참 많습니다. 강화는 땅이 배 모양으로 생겼어요. 그래서 비석을 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석 같은 돌을 세우면 배에 돌을 싣는 것과 같아 섬이 가라앉는다고 합니다. 섬인데도 소규모 저수지가 많이 개발되어 있죠. 일 년 농사로 삼 년은 먹고살 정도라 하니 아주 기름진 땅이죠."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와 애착이 대단하다. 더구나 아직 어머니께서 농사지으시면서 살고 계시다니 더 안

그렇겠는가?
 
가족 이야기를 해볼까요?

"2000년 2월 24일 36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친구 소개로 안양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내를 만나 3개월 후

결혼을 했습니다. 큰딸이 현재 용머리초등학교 1학년이죠. 동네 이름이 용두리인데 학교 이름이 용머리입

니다. 아내는 안양 사람이라 농촌을 하나도 모르죠. 지나다 이건 콩이고 저건 땅콩이고 가르쳐준답니다.

자연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데 그럼 아내는 '나 떼놓고 가라' 합니다. 아내는 칭찬이나 격려를 드러내

놓고 잘 못하는 성격입니다. 아내가 아침에 웃으며 일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임신 8개월로 늦둥

이를 갖고 있어 많이 예민하답니다."

김용의 씨는 대단히 가정적인 사람이다. 아내를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아이가 몇 반인지 담임선생님 성함

까지 알고 있을 정도이다. 이런 그의 가족 아침풍경은 남다르다.

"아침마다 가족이 모두 모여 서로 안아주고 손을 얹고 때로는 잡고 기도합니다. 가족의 아침일기를 쓰는

것이죠. 전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오늘 있을 일을 축복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서약입니다. 마음의 위안과

 평안을 얻고 서로 힘을 줍니다." 

딸 이야기가 나오자 신이 난다. "애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들어봐야 합니다. 기초부분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죠. 아이를 부모 뜻대로 만들거나 변화시키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럼 나중에 '

왜 이렇게 만들었어?' '이렇게 만들어줘서 고마워'란 소리밖에 더 듣겠습니까? 아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서로에 대한 부담이 많지 않을까요? 아이의 주관이 세워지기 전에 확실하게 심어줘야 합니다. 너는 어떤

사람인가? 하고. 그럼 어떤 풍랑에도 견딜 수 있는 아이가 될 겁니다. 이런 것이 되지 않으면 노벨상 탈

애가 일반대학 가는 거와 같습니다. 지켜는 봐주되 휘둘리지 말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아이보다는 소홀함

이 없는 아이, 많이 베푸는 아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과 가족말고 그가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부분이 또 하나 있다.

"취미로 성악과 플루트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니 음악을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죠.

소리를 내는 방법을 알게 되고 귀가 열리고 소리의 깊이를 더해가는 상황입니다. 재미있습니다. 교회에서

 발표도 하죠. 남이 들어도 감동이 될 수 있는 소리를 내고 싶습니다."

김용의 씨는 성악을 즐겨해서 그런가 나름의 울림이 있어 상당히 멋진 목소리를 낸다. 또한 오랜 신앙생활을

해서 그런지 처음 만나는 기자 앞에서 차근차근 말도 참 잘한다. 친절해 보인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나요?

"아닙니다. 어렸을 땐 소심하고 말을 못했습니다. 잘못하면 애비 없는 자식이란 소리 들을까봐 걱정을 하고

많이 위축되어 있었죠. 사실 아이들은 실패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건 데 말입니다. 그러다 시골교회

전도사님을 통해 앞에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 '나도 할 수 있구나'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김용의 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위로 형님이 있고 아래로 여동생이 있는 둘째이다.

가난한 살림에 어머님께서는 '집에서 해줄 게 없다' 하셨단다. 그것이 오히려 김용의 씨를 단단하게 만든

담금질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첫번째 직장은 주점이었다. 컴퓨터그래픽 학원엘 다니려고 아르바이트

로 일했다. 알바 비가 8만 원이었는데 학원비가 7만 원이었단다. 

그후 서산에 있는 현대 오일뱅크에서도 일을 하고 다시 서울에서 건축 실내디자인, 리모델링과 관련한 일도

했지만 회사가 어려워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 게 누구나 평생 맘놓고 살 수 있는 평생 영구

임대아파트를 짓고 싶단다.

"그것을 나는 단련시키기 위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하고 있죠. 쉰 살쯤 되었을 때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요? 인천, 서산, 서울, 안성을 거쳐 쭉 알아가는 단계입니다. 내가 아니

구나, 나를 위해 살면 안되는구나, 나를 만든 이는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관심을 갖길

바랍니다. 독선과 거짓,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내 안에 있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 돌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 개의 직장을 옮겨다니는 것이나 평생 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이것이 인생이죠. 만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돈, 배움, 집의 크기가 아닌 주어진

환경에 만족함, 인생의 즐거움 말이죠. 불평은 우리 인생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아침마다 가족끼리

돈에, 집에, 자식에,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합니다. 나보다는 좀더 남을 위해 살기 바랍니다. 덕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공도로 이사와 안성 사람이 된 지 6년 정도 되었다. 회사가 처음엔 강화쌀로 시작하여 인연을 맺게 되었다가

안성으로 공장을 이전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같이 안성으로 오게 되었단다. 안성은 어떤가요?

"처음엔 낯설고 후에는 자연스럽더군요. 동서남북의 중간이다 보니 어디를 가더라도 참 편한 곳입니다.

나무가 자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나무는 비바람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죠.  강풍이 불 일도 있고 뿌리가

 뽑힐 일도 있겠지만 앗! 뿌리가 뽑히면 안되겠죠. 사람 사는 곳으로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공도의 아파트인데 말을 해보면 아이들도 노인들도 참 선하다는 것을 느껴요. 적당한 토양입니다. 뿌리내리

기에. 질퍽하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고."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마치 종교 지도자나 철학자와 대화를 나눈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한 자세가 그런 기분을 들게 한 것이리라. 공장 앞에서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는 그의 모습이 마치 커다란

나무처럼 느껴진다. 독실한 종교인으로, 능력 있는 직장인으로, 따듯한 아버지로, 든든한 남편으로, 성실한

아들로 살아가고 있는 김용의 씨가 안성에서 튼실한 나무로 자랄 수 있기를 바란다.

신승희 시민기자

 

 
2008/08/21 [14:48] ⓒ 안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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