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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서 하는 일/안성사람들-안성신문

풍산개마을 풍산개 농장 이기운 이장

by 늘품산벗 2008. 11. 2.

‘오지’를 ‘요지’로 바꾸기 위해서
풍산개마을 풍산개 농장 이기운 이장
신승희 시민기자

▶풍산개마을 이기운 이장.     © 안성신문
가을 하늘이 더욱 깊게 푸르러지고 있을 무렵 삼죽의 작은 마을 덕산리에선 개와 사람이 어울려 떠들썩한 축제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가 끄는 썰매를 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손수 썰매를 끌어주며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아빠들, 한 손은 아이 손을 잡고 다른 손은 힘차게 달려나가는 개의 줄을 잡고 함께 달리기 경주를 하는 엄마들,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뜨끈뜨끈 맛있는 두부를 만들고 계신 할머니들, 마을에서 준비한 소머리국밥을 후후 불며 맛나게 잡숫고 계신 할아버지들, 그외 나무공예, 박공예, 염색공예, 차시음, 먹거리장터, 여러가지 체험거리들을 들고 나와 자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 주민들로 마을은 들썩거리고 있었다. 삼죽면 덕산리 풍산개 테마공원에서 열린 ‘농촌사랑 풍산개 축제’ 한마당에 이기운 이장님이 계셨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삼죽면 덕산리 마을 농촌 체험관에서 이기운 이장님을 만났다. 볼 때마다 생활한복을 즐겨 입으신다. 오늘 입으신 검은색 생활한복 때문일까? 더욱 힘 있고 의지 곧은 강한 모습이다. 축제는 어떠셨나요?

“3천 명 정도 다녀갔습니다. 성공적이었죠. 첫 해엔 보리수 축제로 마을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작년 개썰매 대회였고 올해는 세 번째였죠. 하지만 지원도 받고 규모 면으로 보자면 실질적으로는 거의 두 번째인 셈이죠. 산속에서 하는 것이 부담이었습니다. 시내에서 하면 오다가다 구경꾼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많이 왔습니다. 지방에서도 오고 서울에서도 오고. 가능성을 보인 거죠.”

원래 안성 분이신가요?

“고향이 여기죠. 20대에는 나가 있다가 아버지의 유언인 ‘고향을 지켜라’라는 말을 따라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10대째 살고 있습니다. 삼사백 년 정도 되었겠죠. 도시에 나가 건축업을 했습니다. 현장에서 배우며 일하다가 인테리어 사업을 했었는데 사업이 부도가 나고 또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스물아홉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독특한 분이셨습니다. 나무를 좋아하셔서 많이 심으셨죠. 우리집에 있는 향나무나 보리수나무가 다 아버님이 심으신 거랍니다. 거의 50년 이상 된 나무들이죠. 저도 아버님을 닮아 나무를 심게 되었습니다.”

이장님 집 앞에는 메타세콰이어 나무 길이 아름답다. 200여 미터에 걸쳐 양쪽으로 키 큰 메타세콰이어가 쭉쭉 자라고 있다. 많고 많은 나무 가운데 왜 메타세콰이어를 심으셨을까? 그냥 잘 자라서 좋단다. 곧게 자라고 벌레도 없고 관리하기도 쉽고 그래서 심었단다. 마을곳곳엔 이장님이 심으신 나무가 많다. 냇가 양쪽으론 보리수 나무도 심어놓고 도로 옆으론 계수나무도 심어 놓으셨다. 계수나무는 마을 이름인 계곡마을과 같은 ‘계’자가 들어가서 심으셨다나! 아무튼 계수나무 덕에 가을이 되면 달콤한 설탕시럽 냄새가 나는 향기로운 마을이 되었다.

어떻게 풍산개를 키우시게 되었나요?

“15년 전 쯤 94년에 풍산개를 최초로 삼죽에 들여온 노신만 씨로부터 풍산개 5마리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풍산개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죠. 15년 동안 계통번식과 사양관리를 통해 기르다 보니 이렇게 800마리나 기르게 되었습니다. 사료와 질병 때문에 힘들기도 했습니다. 200여 마리를 키우는데 절반이 죽어나가기도 했습니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 그런데 그 녀석들이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죠. 주변 사람들과 집사람은 왜 개에만 매달리는지 날 한심하게 보기도 했습니다.”

풍산개는 어떤 개인가요?

“풍산개는 민족의 명견입니다. 사람에겐 잘 짖지도 않고 주인도 잘 따릅니다. 그러나 다른 짐승에겐 엄한 개이죠. 더구나 풍산개는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습니다. 늑대와 비슷하죠. 그래서 이렇게 많은 개를 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00마리 정도 되었을 때 ‘전세계에서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습니다. 전세계에서 800마리 풍산개를 키우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의 개를 위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많이 도와주죠. 너무 바쁘다보니 친구들이 멀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대신 가정에 충실해집디다. 농장에서 주로 생활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풍산개 테마마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풍산개 농장을 하다 보니 2002,3년부터 매스컴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전통 테마마을 조성사업 지원 등 정부시책이 시작되었고 이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번번이 실패로 끝났는데 그러다가 결국 농림부의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 마을로 선정되었고 곧 농협의 ‘팜스테이’ 마을로도 선정되었습니다.

처음엔 미심쩍어 하던 주민들이 언론에 보도되고 자꾸 화제가 되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농촌 사람들이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만 갈등 없이 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표를 정하고, 진행되는 것이 가시적으로 보여지니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참여는 아직 미진하지만 급하게 하지 않고 하나하나 준비하며 기반을 다지고 있는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전문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적 네트워크도 마련했습니다. 교육이나 회의에 찾아다니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지역주민들 정보화교육도 진행했었죠. 비록 몇 달 하다 말았지만. 체험이나 농촌관광을 위해 공부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경대 최고경영자과정도 수료하고 녹색관광대학에 주민들 7명이 입학해 4명이 졸업도 했습니다. 이장만이 아니라 주민들과 함께 하는 것이 밑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체험마을이 많지만 차별화되지 않으면 그게 그겁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죠. 어떻게 담아내고 체험프로그램을 다양화할 거냐에 성공이 달려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고 쉽지 않았지만 마을 전체가 법인화되었습니다. 주민들이 믿고 따라주는 것에 대해 고맙고 큰 힘이 됩니다.”

풍산개 마을을 만들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풍산개 테마마을이라 하니까 모함이 난무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난 풍산개를 특화시키는 게 싫었습니다. 그냥 토종동물 마을이나 그런 거로 하자고 했었죠. 그런데 전문가들이 풍산개를 특화시키는 것이 테마마을 조성에 훨씬 유리하다며 권유하게 되어 그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언론에 풍산개가 집중 보도될 때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기운만 잘되는 거 아니냐’ 하며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람 만나기도 싫고 많이 힘들었죠.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해왔습니다. 회의는 아무리 바빠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어쩔 땐 한 달에 열흘이나 회의가 있어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습니다. 회의는 빠지지 않았지만 모임에서 가는 여행 등에는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이 워낙 많아 바빠서 그런 것인데 오해가 생기기도 했죠. 세월이 가면 내가 가지고 있는 뜻을 이해하고 동참해 줄 거라 믿습니다. 배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배 아파라 하면 안되고 같이 가야죠.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은 삼죽의 내장리 덕산리 내강리 3개리 10개 마을이 권역으로 묶여 선정되었습니다. 내장리 상장마을에는 등산로도 정비하고 주차장도 만들고 했습니다. 내강리 강촌마을은 공원도 만들고 진입로도 정비했죠. 덕산리는 덕산저수지 쪽도 개발하고 공원도 만들고 풍산개 테마마을을 조성하였습니다. 처음에 각 마을은 자기 마을 발전하는 쪽으로만 진행하길 원해 권역으로 통합적으로 발전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것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 마을은 스물다섯 농가가 있습니다. 배, 젖소, 한우, 친환경 쌀, 풍산개, 약초농장 등 다양하죠. 체험 마을 만들기에 유리합니다. 그런데 농민들이 체험을 통한 작은 돈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일 년 내내 농사지어 가을에 왕창 들어오는 목돈에 익숙합니다. 작은 돈이 모여 큰 돈이 되는 건 데도 말이죠. 예를 들어 옥수수 수확 체험하여 다섯 개에 오천 원이면 큰 수익 아닙니까? 한 자루 몽땅 가져가 헐값에 파는 것보다도. 농사지은 거 망가뜨리는 거 보면 속상합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농촌을 체험하고 알게 되면 커서 엄마 아빠가 되어 또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농촌체험 마을은 돈 버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농촌 젊은이들이 고향을 지키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20년 전부터 나무를 심어왔습니다. 하천 제방 둑에 보리수나무를 천백 주나 심었습니다. 10년 후 20년 후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소득원으로 보리수를 활용한 보리수청, 와인 등이 가능할 것입니다. 새로운 물량을 확보하고 새로운 작목으로 육성하여 보리수마을로 유명해지는 것이죠. 아버님 생각하며 보리수나무를 키우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심은 나무 내가 누리고, 내가 심은 나무 자손들이 소득원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어렵지만 또다른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 살려내는 사람은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실패하는 것이죠.”

보통 5년 정도 이장일을 하는데 이기운 이장님은 장기 집권으로 6년째라고 한다. 이장이 되면서 마을 주민들이 꽤 힘들었을 거라는데 교육, 회의 이런 것들, 해라, 하자 하는 것도 많아졌단다. 하지만 발전하는 게 보이니 많이 도와준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이장일을 6년째 하고 있는데 첫째 목표는 주민화합입니다. 갈등 없애고 서로 위해 주고 생각해주고 말이죠.

이장이 되어 첫번째 한 일이 모 방송국에서 하는 집 지어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헌 집을 철거하고 부녀회에서 집 짓는 사람들에게 밥 해주고 단합되어 똘똘 뭉쳐 해냈습니다. 그때 부녀회에 고마웠고 마을 주민들도 고마웠습니다. 그 집 사람이 아직도 우리 마을에 살고 있고, 또 그 집 아이들이 반듯하게 잘 컸습니다. 그게 보람이죠.

예전에 한번은 30대 녀석이 사고를 쳐 구속된 적이 있었습니다. 합의금이 꽤 많아 마을 자금을 회의를 통해 빌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그 녀석이 감옥에서 몇 년 살다 돌아와 마을에서 빌빌 거리며 사는 것이 낫겠는가 아님 합의시켜 마을에 살게 해주면서 사람 만들어 함께 잘사는 것이 낫겠는가.’”

▶이기운 이장과 그의 부인.     © 안성신문

이장을 하다보면 이렇게 자질구레한 문제들까지 해결해야 한다. 동네 입구에 방지턱도 만들고 경고등을 설치하여 교통사고를 방지하는 일도 했다. 전에는 아주 위험해 사고가 많았는데 그것들을 설치한 후로 거의 사고가 없어졌단다.

조상대대로 같은 땅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들은 함께 살아온 사람들과 땅에 서로 거미줄처럼 얽힌 사연이 많다. 그만큼 정도 깊고 끈끈하다.  

“우리 마을은 땅은 없어 가난한 사람이 많았어도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서울대에 두 명이나 가고 좋은 학교도 많이 보냈죠. 마을의 기운이 좋은가 봅니다. 어렸을 때 4H 활동을 했었습니다. 전기도 없던 35년 전에 가요 경연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때 죽산, 백암 등지에서 300~400명이나 찾아왔었죠. 나무 베다 무대도 만들고, 기획도 하고, 기타 반주 하나로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때 같이 했던 친구들 10여 명이 지금도 매월 25일이면 정기모임을 갖습니다. 마을발전에 대해 이야기도 하면서…….

특혜가 아니라 노력입니다. 하려고 하는 곳에 지원되는 것이죠. 다른 마을들은 아직 이해를 못합니다. 내가 무슨 빽이 있다고 생각하죠. 오지를 요지로 만들기 위해 고생하고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한택식물원 개원식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들을 우리 마을에 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안성은 자원이 많습니다. 엮어만 낸다면. 안성에서 태어나고 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이장님 사모님이 체험관에 들어오셨다. 무슨 서류 문제로 잠깐 들렀다 한다. 내친김에 가족에 대해 여쭤보았다.

“아내는 나와 같은 성격에 뜻이 맞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이죠. 뭐든지 담을 수 있는 큰 함지박 같은 사람입니다. 친지 소개로 만나 결혼했죠. 아내는 꽃을 좋아하고 나는 짐승을 좋아하죠. 24살, 20살 된 아들이 둘 있습니다. 둘 다 아빠 일을 이어나가겠다 합니다. 살면서 대단한 소득을 올리진 못했지만 자식들이 올바르게 커준 게 가장 큰 소득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요?

“서로 서로 위하는 마을, 지역의 중심이 되는 마을을 위해 꾸준히 소득거리를 개발하고 풍산개를 확대 보급하겠습니다. 세계적인 마을, 건방진 말이지만 그렇게 가고 있지 않나요?”

인터뷰를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찾아간 식당 앞에서 커다란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을 발견했다. “저것도 내가 심은 나무예요”, 하고 웃으시는 이장님. 이미 집은 헐려 터만 있지만 그 땅에 그대로 남아 높이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깊어가는 가을 하늘 아래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다.

신승희 시민기자

 
2008/10/31 [11:42] ⓒ 안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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