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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서 하는 일/안성사람들-안성신문

덕창목장 김영갑,김경숙부부

by 늘품산벗 2008. 6. 21.
낙천적이고 성실한, 그렇지만 쉽지 않은
덕창목장 김영갑·김경숙 부부
신승희

 
죽산면에서 축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의 모임인 ‘동락회’, 그곳을 찾은 기자에게 만장일치로 인터뷰를 위해

추천해준 분은 '덕창목장'의 김영갑 씨 부부였다. 추천 이유는 엄청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분들이라는 것

이었다. 너무나 평범한 그러나, 그러기 쉽지 않은 이유를 간직한 김영갑 씨 부부. 언덕 위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덕창목장의 김영갑·김경숙 부부. 성실하게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그렇지만 결코 쉽지 않은 아름다운 인생을 가꿔가는 사람들이다.       ? 안성신문


부부는 고향이 같다. 경기도 포천. 영갑 씨는 포천이 고향이라지만 곧바로 상경하여 서울에서 생활한 기

간이 길었다. 다행히 고향에서 살고 있는 영갑 씨 고모님 덕분에 현재 부인인 경숙 씨와 인연을 맺고 현재

까지 알콩달콩한 삶의 보금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때만 생각하면 부부는 지금도 즐거워지나 보다. 영갑 씨가 자주 고향마을에 내려와 장난꾸러기 소년과

수줍은 소녀로 만나 시간을 같이하며, 우정은 짜릿한 연애감정으로 발전했고 자연스럽게 한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가 되었다.    

1984년 당시 27살이었던 영갑 씨의 "나를 따르라"는 말만 듣고 26세의 경숙 씨는 결혼하자마자 안성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결혼은 좋아서 했다지만 시골에 내려와 사는 게 여자들에겐 많이 망설여지는 것이 현실.

 어떻게 내려오게 되었냐는 질문에 "코 꿰서"라고 말하는 경숙 씨가 활짝 웃는다. 
 
김영갑 씨 원래 전공은 자동차 정비였다. 그래서 졸업을 하고 한진고속에서 몇 년간 근무도 하며 도시 월

급쟁이 생활을 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똑같은 직장생활에 지쳐갈 즈음 어렸을 때 집에서 목장을 했던 기억

을 떠올리며 농촌에 내려가 5년 정도만 고생을 하면 그림 같은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단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내려온 지 13년이 지나서야 완성할 수 있었다. 부부는 애초 계획대로 되지 않

았다며 겸손함을 내비쳤지만, 기자가 돌아본 집은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채 내려온 것이 아니라면 큰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직장생활을 할 때의 습관대로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을 정해놓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다며 웃는 김씨. 엄청 성실하게 사는 부부임에 틀림없다.
 
다행히 안성에선 김영갑 씨의 고종사촌과 그 친구들이 미리 축산업의 터를 잡고 있어 부부가 정착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처음 목장을 시작했을 땐 납유의 어려움이 가장 컸다 한다.

"86년 목장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적으로 축산불황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지요. 젖소의 젖을

 짜놓아도 납유를 할 수가 없으면 모든 게 허사잖아요. 당시엔 안성시에서 각 목장마다 우유회사를 정해

주었어요. 갓 시작한 목장은 우유회사가 정해지지 않고, 또 당시 우유 소비량이 많지 않아 우유회사에서

도 쉽사리 목장을 늘리지 않았지요. 그래서 우유를 짜 고종사촌 형님의 납유에 끼워넣는 식으로 출발을

했어요." 지금은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힘이 붙였을까. 
 
송아지는 태어나면 두 달 정도 우유를 먹여 키운다. 그리고 14개월 정도 자라면 임신이 가능해지고 인공

수정을 시켜 9개월 반 정도의 임신기간을 거쳐 새끼를 낳으면 우유를 짤 수 있단다. 그 후 3번 정도의 임

신을 통해 거의 평생 우유를 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통 하루에 80~90kg의 우유를 생산해낸다니 정말

 대단하다. 경숙 씨는 송아지를 키우는 것도 아기 키우는 것과 같다며 가축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표현한

다.
 
영갑 씨와 경숙 씨 사이에는 새롬이라는 아주 예쁜 딸이 있다. 결혼 후 14년 만에 낳았다는 귀한 딸이다.

"97년에 낳았는데, 미숙아로 태어나 병원비 대느라 너무 힘들었지요. IMF 시기였잖아요. 게다가 임신하고

는 아기 때문에 서울에 미리 가 있었어요. 잘못될까봐 조심하느라고. 그래서 7개월 가량을 신랑 혼자 여기

서 생활하느라 고생이 많았지요. 목장 일에 혼자 밥해먹느라……."

그렇게 귀하게 얻은 딸이 이제 5학년이 되었다. 외동으로 자라 남 배려하는 게 부족하다며 조금은 걱정

어린 말을 하지만 부모를 보면 그 아이를 알 수 있듯이 아주 착하고 성실하며 낙천적인 심성을 가진 아이

로 자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언론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나운서나 기자 같은 자기 중심이 뚜렷한 직업을 가졌으면 해요. 이왕이면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갔으면 좋겠고, 후후후. 내가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삶의 조언을 해줄 어른이 없어

서 참 아쉬움이 많았어요. 폼나게 살기 위해서는 배움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본인이 열심히 공부를 해

야지 뭐……." 영갑 씨가 귀하게 얻은 딸에 대한 바람을 내비친다.
 

▶부부는 끊임없는 경쟁의 논리 속에 무너져가는 농촌공동체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다.      ? 안성신문


목장은 넓고 아름다웠다. 관리에만도 시간과 노력이 꽤나 필요하겠다 싶다.
"예전에는 목장 일만 해도 바빠서 그냥 제초제를 사용했었는데 사오 년 전부터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힘들지만 그냥 예초를 하지요. 제초제 사용은 단순히 풀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땅에 흡수되어 토양을

죽이게 되지요. GMO 농산물이라고 들어봤나요? 농약에는 선택성 농약과 비선택성 농약이 있는데 비선

택성 농약은 모든 풀을 다 죽이는 거고 선택성 농약은 특정 식물만 남기고 나머지를 죽이는 농약이에요.

 바로 이 선택성 농약에 살아남게 하는 것이 GMO 농산물입니다. 결국, 땅에 스며든 제초제 성분을 다시

흡수해 식물체 몸에 쌓이게 하는 것이데, 그런 농산물이 과연 우리 몸에 안전할 수 있겠어요?"

얼마 전 김영갑 씨는 촛불문화제에도 참석했다.
"소비자들이 얼마나 안전하고 깨끗하고 신선한 먹거리를 요구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농·축산업자들이 식품생산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저 생산해서 팔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고요."

"그리고 현재 소가 먹는 사료의 자급률이 너무 떨어지고 있어요. 많은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지요. 제가 알기로는 현재 사료자급률이 20%에 지나지 않고 곡류사료는 거의 100% 수입되고 있

는 현실이에요. 지금같이 자급률이 바닥을 기고 있고 사료값이 자꾸만 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에서

사료를 수출하지 않는다면 값싼 수입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는 요즘 최대 사안에 대해서도 한마디 잊지 않았다. 
"FTA 같은 국가간의 교역문제는 서로간의 이익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밀고 당기기를 하며 합의점을 찾아

내야지, 이번엔 방미가 아니라 무슨 조선시대에 왕이 오르면 중국에 인사드리고 조공을 바치는 것처럼

비쳐졌어요. 마치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어 미국에 인사하러 가며 조공으로 쇠고기 교역문제를 바친

것처럼 말이지요. 그 후 양파껍질 벗기듯 협상의 문제점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지 않나요. 국가간

교역에 있어 수입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안전한 축산물이 들어와야 되는 거 아닙니까?"
 
자신의 일에 대해 애착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영갑 씨는 지금 농촌의 현실에 대해 걱정이 많다.

"사실 목장 일은 3D업종 중 하나잖아요. 그래도 초심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하고 싶어요. 땅하고 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발전 발전 하며 시골 사람들도 땅값 오르길 바라고 있지만, 시골 땅값이

올라봤자 서울에서 아파트 얼마짜리를 사겠어요? 땅값이 오르면 농민은 떠나야 합니다. 결국 직장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급격한 산업화 때문에 농촌도 경쟁관계로만 너무 몰아붙이고 있나 생각을 해봐요. 공동체 생활이 무너

지는 건 특히 농촌에서 최대의 위기지요. 예전엔 품앗이란 게 있어서 일을 많은 사람들이 같이 나눠 했는

데 지금은 그 많은 일을 혼자 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생겨요. 한국 농촌을 살리는 방법은 품앗이, 공동체

문화라고 생각해요. 편리함 때문에 농촌의 정취가 사라지는 게 너무 안타까울 뿐이에요."
 
앞으로의 바람에 대해 물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싶어요. 농업이 그리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소비자들이 원하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우리 목장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들러서 우유 한잔 마시며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되

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사람들이 분뇨에 대한 생각을 고쳤으면 좋겠어요. 냄새나는 혐오스런

것이 아니라 땅에 환원되어 농작물을 생산하고 인간이 공유한다는 생각으로 자원화시키는 노력이 필요

하겠지요."

인터뷰하는 내내 웃음을 잃지 않던 아직도 해맑은 소년과 수줍은 소녀 같은 김영갑·김경숙 부부.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신승희 시민기자
 

 
2008/06/20 [15:13] ⓒ 안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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