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벽을 오르는 담쟁이덩굴
2015. 12. 14
겨울이 되면 유난히 시선을 잡는 게 있다. 누가 그렸을까? 담벼락에 그려놓은 낙서치고는 너무나 수준 높은 그림이다. 멀리 굽이치는 산줄기에 기암절벽이 있고, 쏟아져 내려오는 폭포와 휘돌아나가는 강이 흐르고, 넓게 펼쳐지는 들판도 있다.
담을 뒤덮었던 잎들이 다 떨어지자 선명하게 드러나는 담쟁이덩굴 줄기들이 기어간 역사가 그림이 됐다. 한 폭의 산수화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담쟁이덩굴이 빚어낸 담벼락 그림.
상상의 세계에 따라 다른 그림이 펼쳐지는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담쟁이덩굴.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과 담벼락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이 보이는지 이야기를 해 보았다.
“저기 티라노사우루스가 보여요”
“어! 트리케라톱스가 풀을 먹고 있어요”
순식간에 담쟁이 줄기가 그린 그림으로 인해 아이들의 눈앞에는 공룡시대가 펼쳐진다. 너무나 유쾌한 담쟁이 미술관.
담쟁이덩굴은 포도나무와 같은 과로, 풀처럼 보이지만 나무이다. 덩굴줄기가 뻗어나간 구심점을 찾아보면 여느 나무와 같은 엄연한 줄기가 땅에서부터 올라와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꽤 굵어지고 딱딱해지는 것이 영락없는 나무다.
또한 덩굴나무라 덩굴손이 뻗어 있는데 누구를 잡아 감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붙어서 타고 올라간다. 이때 잘 붙을 수 있도록 덩굴손 끝부분에 청개구리 발가락처럼 생긴 것이 달려있는데 이를 ‘흡반’이라 한다. 오징어나 문어의 빨판처럼 동그랗게 생겨 다른 물체에 달라붙어 기어오르는 방식이다. 칡이나 가시박처럼 이웃하는 식물을 죽이거나 생육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예전에 담쟁이덩굴이 건물 외벽을 뚫고 들어가 건물을 약하게 만든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나 담쟁이덩굴의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면 큰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옛날 흙으로 허술하게 지어진 집이라면 모를까 요즘같이 콘크리트나 벽돌같이 단단한 건물이 그 흡반에 의해 낡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외벽에 쏟아지는 햇빛을 차단시켜 녹색커튼 역할을 하거나 증산작용 등에 의해 주변 온도를 떨어뜨려 여름철 건물의 온도를 낮춰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초록이 주는 심미적 안정감도 빼놓을 수 없다.
담쟁이덩굴은 사는 곳에 따라 달라붙는 물체가 다르다. 숲에 있다면 나무줄기에 달라붙어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때로는 커다란 바위를 타기도 한다. 마을에 있다면 집의 벽을 타거나 담벼락을 타고 퍼진다. 예로부터 담장에 많이 있었기에 이름도 담쟁이다.
담쟁이덩굴 잎은 여름에는 초록 융단처럼 뒤덮다가 가을이 되면 붉게 물든다. 단풍의 색이 아주 아름답다. 또한 여름이 시작할 즈음 꽃이 피는데 노르스름한 연두색이다. 가을이 되면 까만 구슬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많이 달린다. 특히 새들이나 야생 동물들이 좋아한다.
또 담쟁이덩굴 줄기는 단맛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엔 줄기를 고아서 엿을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가늘게 뻗은 줄기를 잘라 동글게 말아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어 솔방울 따위로 장식을 하면 근사하다.
담쟁이덩굴이 묘사된 문학작품 중 유명한 작품으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있다. 고된 비바람 속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잎새를 보며 삶의 희망을 느낀 어느 젊은 예술가 이야기인데 이 때 나오는 마지막 잎새가 바로 담쟁이덩굴 잎이다.
도종환 시인은 불안한 미래와 참담한 현실 속에서 절망을 느꼈을 때 문득 보게 된 담쟁이덩굴을 보며 시를 썼다. 도종환 시인이 노래한 ‘담쟁이덩굴’을 보면, 넘을 수 없다고 고개를 떨구며 어쩔 수 없는 절망의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고 했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가로막는 벽이 더 강고해지는 요즘이다. 벽에 붙은 담쟁이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어떤 그림이 보이는가. 담쟁이처럼 기어이 절망의 벽을 넘는 담쟁이가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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