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3. 25
‘너무 늦은 거 아닐까? 소위 말하는 뒷북치는 셈인데......’
한참을 주저하며 망설여도 도저히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이 소재가 주는 여운이 너무 강하여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못하게 막고 있다. 이러다가 원고 마감 시한을 지키지 못하겠다는 조바심도 난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 얘기를 꺼내야 겠다.
작년 11월, 12월 사람들 사이에 많은 인기가 있었던 사극 드라마가 있었다. ‘옷소매 붉은 끝동’ 이라는 조선시대 궁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였다. 물론 남자 주인공은 정조 이산이었지만 정조가 사랑했던 궁녀 성가 덕임과 그 주변 궁녀들의 이야기가 주된 흐름을 차지했다. 주변에서 재밌다고 추천을 하기도 했지만 필자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보지를 못했고 드라마는 끝났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다 이번에 결국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았다. 원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작가나 연출가의 의도, 배우의 연기와 배경의 의미에 대해 분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본인에게는 신나고 흥미로운 취미지만 옆에서 보면 좀 피곤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필자의 취미생활이다. 드라마를 보며 생각한 백 가지 중 ‘숲과 들에서 누리는 자연산책’ 이라는 제목에 맞게 몇 가지 자연요소에 대해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드라마 장면 중 한지로 만든 꽃들이 눈에 띄었다. 매화, 국화, 모란, 능소화가 그 주인공들이었는데 연출가의 섬세함과 치밀함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이산과 덕임이 머무는 각각의 방 한쪽에는 계속 화병이 있고 그 안에는 의미를 내포하는 꽃가지들이 꽂혀져 있다.
이산의 방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매화였다. 극 초반 세자 이산이 등장했을 때는 매실나무의 가지에는 푸른 잎들만 무성하다. 그러다 왕이 되기 위한 수련과정이 진행될수록 매화가지에 잎은 사라지고 꽃망울이 생겨 점점 자라나 한 두 송이 꽃을 피우다가 여러 가지 시련을 뚫고 마침내 왕이 되자 매화꽃이 만발하게 된다. 매화는 엄동설한의 매서운 칼바람을 이기고 꿋꿋하게 버틴 끝에 고고한 향기를 내뿜으며 핀다고 하여 절개와 지조의 상징인 선비정신으로 통한다. 역사적으로 어렵게 왕이 되었으나 정조대왕으로 불릴 만큼 위대하고 찬란했던 이산의 인생과 닮아있다. 또한 두 사람의 마음이 깊어질수록 꽃송이가 풍성해지는 것을 표현했을 수도 있다. 꽃이 만발하듯 사랑의 감정이 피어나는 거니까.
왕이 된 정조의 집무실 화병에는 매화 말고도 흰색 모란과 노란 국화가 함께 꽂혀있다. 모란은 위엄과 품위를 상징하며 꽃 중의 왕으로 통한다. 국화는 날씨가 차가와진 가을에 서리를 맞으면서도 늦게까지 피어 매화와 같은 기품과 절개를 상징하는 군자의 꽃이라 여겨지고 있으니, 매화, 모란, 국화는 정조대왕을 상징하는 꽃으로 더 할 나위 없다.
궁인이었던 성가 덕임은 정조의 후궁이 되어서야 꽃 화병을 갖게 되었다. 덕임의 방에는 능소화와 흰 국화가 꽂혀져있다. 정조의 후궁으로서 살다간 의빈성씨의 결말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능소화와 흰 국화는 너무 결정적이었다. 능소화는 나팔꽃처럼 생긴 주황색 꽃이 피는 덩굴나무로 슬픈 궁녀의 전설이 담긴 꽃이다. 옛날 어느 궁궐에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는데 임금의 사랑을 받게 되어 궁궐 어느 한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그 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소화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혹여 임금이 찾아올까 싶어 담가를 서성거리고 담 너머로 하염없는 눈길을 보내며 애만 태우다 기다림에 지쳐 쓸쓸히 죽어갔다. 그 후 주홍빛 꽃이 곱게 피어났는데 이 꽃이 바로 능소화라는 슬픈 이야기다. 정조의 사랑을 받았지만 많은 제약 속에서 인내의 삶을 짧게 살아야 했던 덕임, 의빈성씨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능소화다. 더구나 옆에 같이 꽂혀있는 흰 국화는 비극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어 화면이 클로즈업 되며 능소화와 흰 국화를 비췄을 때 슬픔을 막을 수가 없었다.
덕임이 죽고 정조는 언덕에 올라 덕임을 잠시 잊어버리기로 한다. 왕으로서 책무를 다하기 위해 개인의 슬픔은 묻어두어야 했다. 그 장면에서 필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필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언덕과 성곽과 그리고 그 곳에 서있는 커다란 오동나무가 화면 가득히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인시 백암면 아랫동네인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죽주산성이 그 촬영지였다. 산성 꼭대기에는 아주 커다랗고 오래된 오동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옛날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딸을 시집보낼 때 그 오동나무로 농이나 문갑 같은 가구를 만들었다. 또한 장례를 치를 때도 오동나무로 만든 관을 사용하고 상주가 짚던 지팡이인 상장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산이 덕임을 떠나보내기 위해 찾은 성곽언덕에서 그런 정조를 바라보고 있던 나무가 하필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함께 하는 오동나무였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이지만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꽃과 나무뿐만 아니라 또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고양이었다. 덕임이가 생각시 시절 세자의 서고를 지키는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그 서고 창가 벽에 걸린 족자에는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고양이 그림을 보며 생각시 덕임은 말을 걸곤 했다. 왜 고양이 그림일까? 다른 동물에 비해 상당히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고양이가 궁녀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선택하는 삶을 살기 원했던 덕임이의 자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유추해본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고 안타까워하는 왕인 정조 이야기와 목소리와 미소가 너무나 멋졌던 배우 준호, 섬세하고 치밀한 감독에 의해 잘 만들어진 드라마를 보는 재미에 푹 빠졌던 일주일이었다. 자연의 이야기는 이렇게 우리 생활에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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