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자존심 하나로 아이들과 꿈의 길을 열다 | |||||||||
임용빈 안성두원공고 테니스부 감독 | |||||||||
안성시 죽산면 죽산중학교에는 테니스 국가대표 선발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 비석의 주인공은 정작 고등학교를 안성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다녀야 했다. 이처럼 지역의 인재들이 자꾸만 외지로 빠져나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던 안성두원공고 교장선생님은 테니스부를 창단하게 된다. “예전에 수원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일할 때는 죽산중학교로 아이들을 스카우트하러 왔었습니다. 이젠 상황이 역전되었죠. 외지로 스카우트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성에서 아이들 곁에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원공고 테니스부가 창단이 되면서 이곳으로 스카우트되어 온 임용빈 감독은 예전에 죽산의 아이들을 수원으로 데리고 간 장본인이다. 화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께서 식당일을 하고 계셨기에 학교 끝나고 갈 데가 없어서 테니스를 하게 되었단다. 청소년 대표로 미국도 다녀왔다. 그러나 목표했던 대학에 떨어지고 처음 맛본 실패는 너무 쓰라렸다. 전문대를 다니다가 군대 제대 후 편입해 남서울대학에 진학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가 못해 학교를 다니며 학비를 내가 벌어야 했습니다. 한 학기 다니고 휴학해서 등록금 벌고 또 한 학기 다니고 다시 휴학하고, 어렵고 길게 대학을 다녔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그의 곁에서 8년이나 연애하면서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를 해준 아내가 있다. 스물다섯에 아는 선배의 소개로 만난 아내가 너무 좋아 2년을 무작정 따라다녔단다. 아내 없이 못 살 것 같았지만 돈도 없고, 직장도 번듯하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을 때 아내가 오히려 같이 벌면 되지 않으냐며 용기를 줘 반지하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아내는 내가 뭔가를 해낼 것 같았답니다. 지금 얼마를 버는 것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며 저에게 자존심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밀고 가라고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았죠. 장인 장모님은 잘 생긴 사람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옛날부터 아파트에 사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 친구들 집에 놀러가면 뜨거운 물 나오고 보일러 마음대로 돌리며 겨울에는 훈훈하고 여름엔 에어컨이 있는 아파트가 부러웠다. 그래서 지금 아파트에 살고 있어 너무 좋단다. 더구나 얼마 전 태어난 아이는 이제 백일이 갓 지났다. 운동부 감독하며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안 들어가는 날이 더 많다보니 아주 어렵게 생긴 아이란다. 집에 학사모 사진 하나 거는 것도 또 하나의 바람이었다. 너무 길게 대학을 다녀 제대로 된 앨범도 졸업식 사진도 없었다. 이제 8월이면 대학원 졸업을 한다. 아내의 도움으로 대학원은 중간에 쉬지 않고 쭉 다닐 수 있었다. 졸업식 학사모 사진을 걸어놓을 수 있어 좋다. 더구나 자식과 함께 찍은 사진이라서 더 좋다.
테니스 선수생활을 10년 했고 지도자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12년이 지났다. 열아홉에 아르바이트삼아 동호인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처음 지도자의 길에 발을 내디뎠었다. “서울에서 동호인들을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스물세 살에 삼, 사백씩 벌었죠. 그땐 어리고 술도 잘 먹고 또 마구 계획 없이 살다보니 결국 마이너스통장만 남더군요. 압구정과 청담동 쪽에서 일하다보니 저도 어느새 거기 사람이 돼버렸습니다. 어느 날 보니 제가 팔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있더군요. 가랑이 찢어지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월급 백이십만 원을 받으며 중학교 코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운동부 코치는 노력한 거에 비하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 2002년 수원에서 고등학교 코치를 했을 때 전국대회에 나가 우승도 많이 하고 전국체전 선발에도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나중에 보니 통장잔고에 4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 공원에 앉아 담배 피우며 참 속상했었다. 그러다가 수지에서 일반인들 대상으로 테니스 강사로 일했는데 사기도 당하고 불공정대우를 받았다.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손을 내민 사람이 있었다. “노광춘 감독님은 중학교 코치시절 경쟁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분은 테니스가 아니라 정구를 하신 분인데 오히려 테니스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전에 해온 방식 그대로 하고 있더군요. 그분을 보면서 공부를 해야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수원에서 고등학교 코치로 있을 때 죽산중학교에서 아이들을 스카우트하면서 당시 죽산중 코치로 계시던 선생님은 ‘너라면 믿고 아이들을 보낼 수 있겠다’ 하셨죠. 잘나갈 때 찾아오는 사람보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이 진짜라고 그분은 제가 어려울 때 항상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셨습니다.” 현재 노광춘 감독은 안성시청 테니스팀의 감독으로 있고, 그의 지지로 임용빈 감독은 안성두원공고로 오게 된다. 조한신 교장선생님의 뚝심과 임용빈 감독의 열정으로 4년이라는 길지 않은 역사지만 2명에서 시작하여 이제 10명의 부원이 있는 두원공고 테니스부는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우리나라 주니어 테니스계의 큰 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작년엔 전국체전 평가전에서 단체 2등을 차지했다. 또 올 3월에 열린 회장기전국테니스대회에서 고등부 단체전 3등을 했다. 노상우 선수는 각종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있고 이태우 선수는 요즘 이덕희배 국제주니어테니스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인터뷰 당일만 해도 벌써 복식 4강 진출의 소식을 전했다. 또한 임용빈 감독은 한국 중ㆍ고 테니스연맹 이사로 선임되는 기쁨도 안았다. 아직 전용 코트가 없어서 천안 종합운동장, 남서울대로 옮겨 다니며 연습을 하고, 안성종합운동장에서 연습할 땐 코트의 반은 정구팀이, 그 나머지를 사용하는데 그것도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안성시청팀이 하는 곳에 간신히 껴서 하는 셈이다. “현재 학교에 노상우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테니스 국가대표 이진이죠. 우리나라 대표 이형택 선수의 대를 이을 선수라는 평을 받고 있는 선수입니다. 고등학생이 프로시합에 출전해 겨루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드물죠. 이렇게 인재를 알아보고 나라에서 키워주고 있는데 오히려 안성시에선 지원이 적은 게 아쉽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장비도 만만치 않은 데다 국제대회에 나갈라 치면 자비로 시합을 나가야 하는데 돈을 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인재에 대한 보조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직까진 임용빈 감독의 지인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는 편이다. 노광춘 감독이 그렇고 테니스 장비 전문회사인 윌슨사의 안용길 과장이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준다. 그러나 개인들의 지원은 한계가 있다. “어떤 아이는 제가 악랄해 죽이고 싶었답니다. 10년 후에도 제가 보기 싫으면 인연을 끊자고 했습니다. 지금은 안성시청에서 테니스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된 10년 후에 좋은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부산에서 유학을 온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정형편도 넉넉하지 않고 특별한 선수도 아니었는데 자꾸 안 좋은 길로 빠져들어 안타까웠죠. 고집은 엄청 센 아이였는데 결국 저를 믿고 따라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 아이를 전국대회에서 250명 중 2등을 만들었습니다. 그 일로 인생이 바뀌었죠. 대학도 자기 힘으로 가고 현재 충남도청에 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때 운동을 그만두려는 아이들이 있다. 그러나 운동한다고 공부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만둬버리면 대안이 없다. 그렇게 흔들리는 아이들을 바로잡아 대학을 보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어느덧 군대에 있는 애가 있는데 그애가 사준 소주가 제일 맛있다. “운동부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공부만 하는 아이들하고 운동도 하는 아이들을 똑같이 평가하면 안되죠. 대회에서 성적이 안 나면 팀의 존폐위기가 오는 실정으로 모는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시합이 전쟁이 되고 아이들에게 스트레스가 심합니다. 공부도 하면서 운동할 수 있게 클럽화가 되었으면 하는데……. 사회의 학벌 지상주의가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임용빈 감독은 아이들이 큰 꿈을 가졌으면 한단다. 지금은 우리나라 대표선수가 된 이형택 선수가 대학 1학년 시절 임용빈 감독에게 자신은 세계적인 선수가 될 거라 말했을 때 반신반의했었는데 정말 그렇게 되더라며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만 생각하지 말고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그 꿈을 아이들이 잃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운동을 하다 보니 좋은 운동화가 선물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럼 여자 거로 바꿔서 어머니께 선물로 드린다. 그런 데도 어머니는 아끼신다고 신발장에 넣어놓고 그냥 시장에서 아무거나 사 신고 하신다. 그게 싫다. 평생 운동화를 신다보니 신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데 어머니께서 좋은 운동화를 신었으면 좋겠다. “가족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고 어려서부터 꿈인 체육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학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력은 없는데 스트레스로 인해 요즘 탈모가 생겼습니다. 머리가 많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임용빈 감독은 장인과 장모님이 오셨다며 급히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인터뷰 내내 한국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평소에 하지 못했던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한없이 쏟아내던 그가 생각났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저렇게 가족을 사랑하며 고마운 지인들과 함께 꿈나무들을 키워내는 지도자로서 임용빈 감독은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신승희 시민기자 | |||||||||
기사입력: 2009/04/23 [14:48] 최종편집: ⓒ 안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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