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최대의 병은 바로 건망증이다. 아침마다 집을 나설 때면 항상 두 세 번 들락날락 하기 일쑤다. 열쇠, 핸드폰, 다이어리, 지갑이 그 단골메뉴다. 아침뿐만 아니라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가 자리를 뜰 때 쯤이면 어김 없이 한 두 가지를 흘리고 다닌다. 이미 시계와 썬글래스는 내 손을 떠나 길을 헤맨지 오래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리로 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싸놓고는 출발할 때 자동차 문을 연답시고 차 위에 도시락을 올려 놓곤 그냥 출발하여 친구들에게 하루 종일 놀림을 당한 적도 있다. 물론 그 도시락은 우리 동네 골목길에 떨어져 있었다 한다.
나의 불치병을 아는 친구들은 결국 이런 악담까지 하고 말았다.
"나중엔 도대체 뭘 잃어버릴까? 너를 흘리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이다."
결국 나의 불치병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열흘 전 친구를 만나러 대구로 가는 중이었다. 세 시간 넘게 걸리는 여정이었으므로 고속버스는 두 시간 가량을 달린 다음 칠곡 휴게소에서 잠시 쉬게 되었고, 나는 잠시 화장실엘 들렀다. 볼일을 보고 나와 손을 씻고, 거울을 보며 미소도 지어보곤 친구를 만난다는 가슴 벅찬 설레임에 휴게소를 나와 버스로 향하고 있었다.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고, 지갑을 화장실에 놓고 왔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급히 뛰어 들어가니 누군가가 내가 들어갔던 그 화장실 칸에 들어있음을 알았고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쉽게 나오지를 않았다. 시간은 흘러가고 버스가 출발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나를 엉뚱한 상상에 빠져들게 했다.
' 왜 안나올까? 다른 화장실은 다 비어있는데 왜 여기만 사람이 있을까? 유독 이 사람은 다른 곳을 제쳐놓고 여길 들어간 걸까? 혹시?'
급기야 나는 이 사람이 지금 내 지갑을 뒤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벌써 돈은 그 사람 주머니에, 내 지갑은 갈기갈기 찢어져 휴지통에 쳐박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은 꽤 지나갔고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 내려가는 소리도, 용변 보는 소리도 없었다. 그것이 날 더욱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버스가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급한 마음에 생각은 더욱 빠르고 가파르게 내질러갔다.
'어쩌면 이 사람 날 노리고 있을지 몰라. 현장범으로 몰렸으니 이 문을 팍 열고 날 덮칠지도 몰라'
언젠가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난 두려움에 떨었고, 마침 화장실엔 그 사람과 나 밖에 없었다. 숨막히는 침묵이 화장실 안을 짖누르고 있었다. 결국 나는 신경질적인 노크를 했고 그에 맞춰 안에서도 응답이 들려왔다.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어, 죄송한데요. 제가 지갑을 놓고 왔거든요."
"아······ 이거요? 밑으로 드릴께요. 받으세요."
잔뜩 격양되고 떨리는 내 목소리와는 반대로 너무나 상냥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로는 내 지갑이 빼꼼 내밀어졌다. 아마 그 사람은 내 말을 듣고 그제서야 안을 둘러본 듯 했다.
지갑을 받고 버스로 돌아오면서,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난 계속 떨어야 했다. 부끄러움에.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 어떤 말로도 사과를 할 수 없었다. 얼굴도 안 본 그와 나 사이에 나의 불순한 생각때문에 별의별 관계가 다 지어졌고, 그는 나에게 모욕을 당했다.
사람에게 있어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가 바로 망각이라고 한다. 무언가를 잊어버린다는 것, 어린 시절 날 괴롭혔던 친구들의 그 못된 행동도 잊어버리고 다시 만나 반갑게 손 맞잡고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것, 첫사랑의 아픈 상처를 잊고 다시 좋은 사람 만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애 최고의 행복을 꿈꾸는 것, 소중한 사람을 다신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보내고서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으로 지쳐 쓰러져도 다 잊고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것, 우리에겐 잊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망각이 만병 통치약은 아니듯이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것도 많다. 수많은 소중한 진실들을 우린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며 살아가야 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그렇고 믿음이 그렇다. 지갑을 잃어버리면서 난 그것까지 잊어버릴 뻔하였다. 건망증이라는 작은 엄살은 통하지 않는다.
내일 아침 문을 나서며 분명히 몇 번을 생각할 것이다. 뭐가 빠졌을까? 허둥지둥 집을 나서겠지만 잊지 않고 맘속에 꽉 잡고 가야 할 것이 있다. 희망과 사랑 그리고 믿음이다.
2001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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