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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서 하는 일/나무칼럼-용인시민신문

“딱” 소리 나는 고소한 열매, 개암나무

by 늘품산벗 2021. 7. 16.
  •  입력 2017.08.17 09:53

 

 

옛날 옛날에 착한 효자 나무꾼이 살았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땅에 떨어진 열매를 발견하곤 가족들에게 줄 양으로 하나 둘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일을 하다 보니 그만 밤이 오고 말았고 어쩔 수 없이 산 속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에서 밤이슬을 피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간 집이 알고 보니 도깨비들이 살고 있는 소굴이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도깨비는 찾아와 그들만의 금은보화 잔치를 벌였다. 숨어서 이를 다 지켜본 나무꾼은 밤이 깊어오자 배가 고파져 그만 낮에 주워온 열매를 생각하곤 딱딱한 껍질을 까기 위해 꽉 깨물고 만다. 껍질이 깨지며 나오는 “딱” 소리에 도깨비들은 집이 무너지는 줄 알고 혼비백산 도망을 가고 나무꾼은 남겨진 금은보화와 도깨비 방망이를 얻었다는 옛날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대한민국에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이야기에 나오는 열매가 개암나무 열매인 ‘개암’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뽑아낸다면 훨씬 줄어든다. 개암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을 추려내면 더 적은 사람이 손을 들 것이다. 그리고 그 개암을 직접 먹어본 사람을 손들라 하면 몇 사람이나 손을 들 수 있을까? 그 개암이 지금 산에 달리고 있다.

 

개암나무를 구분하는 단서는 몇 가지가 있다. 이른 봄에 피는 개암나무의 꽃, 초록색 잎에 누군가 칠해 놓은 것 같은 붉은 자국, 그리고 여름에 달려 가을에 익는 독특하고 고소한 열매가 그것이다.

이른 봄이 되면 숲에는 부지런한 꽃들이 하나씩 피어나기 시작한다. 복수초와 노루귀들이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화사하게 피어나고 생강나무와 올괴불나무들이 이른 봄 전령사 역할을 톡톡히 하며 숲에 색을 더해준다. 그런 와중에 개암나무에도 봄 기운이 닿으면 작년 여름에 만들어 놓은 꽃송이들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수꽃은 노란 긴 막대모양으로 주렁주렁 매달리고 암꽃은 암술대가 마치 촉수를 뻗은 붉은 말미잘 모양으로 작고 앙증맞게 핀다.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연둣빛 싱그러운 새잎을 기대했건만 어째 펼쳐지는 잎이 좀 이상하다. 마치 누군가가 ‘이게 개암나무 잎’이라고 표시를 해놓은 것 마냥 초록색 잎 가운데에 붉은색으로 성의 없이 칠해져있다. 이른 봄 붉은색으로 새잎을 틔우는 식물이 많은데 이것들은 모두 ‘안토시아닌’이라는 붉은 색소가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연한 잎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개암나무의 붉은 색은 마치 개구쟁이 낙서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붉은색에 얽혀있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옛날 그리스에 아주 예쁜 공주가 있었다고 하는데 무슨 연유인지 공주는 자신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했고 이에 호기심 많은 시녀 하나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공주가 세수할 때 몰래 훔쳐봤다. 이 사실을 안 공주는 시녀를 처형했고 그 때 시녀의 피가 공주의 얼굴에 튀고 만다. 시녀의 한이었을까? 그 후 붉은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고 괴로워하던 공주는 끝내 죽고 말았다. 공주의 무덤가에서 한그루의 나무가 자랐는데 바로 초록색 잎에 붉은 자국이 나있는 개암나무라고 한다. 참으로 절묘한 이야기이다.

개암나무의 영어이름은 헤이즐(hazel)이다. 그래서 개암나무 열매 개암은 헤이즐넛(hazelnuts)이라고 부른다. 고소한 맛과 향 때문에 견과류로 먹기도 하고 커피, 초콜릿, 과자 등에 넣어 먹는다. 향커피의 하나인 헤이즐넛향 커피가 유명하다. ‘한 줌의 헤이즐넛이 평생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터키 속담이 있을 정도로 여러 가지 식품과 약재로 쓰인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은 아니지만, 정월대보름 부럼으로 개암을 깨 먹었고 제사상에도 올렸다고 한다. 지방에 따라 ‘깨암’, ‘깨금’이라고도 불리는데 요즘은 나무를 만나더라도 개암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공주의 마음인가. 그런데 다행히 올해는 개암이 달린 것이 많이 눈에 띈다.

 



봄에 말미잘같이 생긴 꽃을 보고, 여름에 개암이 열림을 눈도장 찍고, 가을에 밤처럼 갈색으로 갈아입는 개암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하다. “딱” 소리 나게 껍질 까서 고소한 개암을 맛보게 될 날이 손꼽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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