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8.12.11 12:01
겨울에 나무를 본다는 것은 남아있는 열매를 보거나, 다른 계절엔 눈길이 가지 않던 나무의 껍질을 보거나, 저마다 개성 있게 생긴 겨울눈을 보는 것이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나무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 ‘아! 봄부터 열심히 살아온 나무는 일년 동안 이만큼 컸구나!’를 알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중에 아직 남아있는 열매를 보는 것은 마치 기대도 안했는데 덤으로 얻는 재미와 같다.
십여 년 전 이맘때 즈음 따듯한 남쪽을 여행하던 중 한 시골마을에 도착해 정겨운 풍경에 빠져 작은 골목길들을 오가다 한 나무를 만나게 됐다. 처음엔 나무껍질이 초록색을 띠며 서 있던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다 올려다본 나무 윗부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치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들이 빽빽이 매달려있는 듯했다. 떨어진 잎인 양 주워보니 나뭇잎이 오목하게 휘어진 것이 마치 작은 돛단배 같았다. 가장자리엔 쭈글쭈글한 동그란 것들이 몇 개씩 붙어있었다. 신기한 모습에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동네 할머니가 우리를 발견하곤 한마디 건네셨다. “그거 씹으면 고소하지. 우리 땐 많이 먹었어. 옛날엔 먹을 게 없으니까 그것도 고마웠지” 이걸 먹었다고? 콩 중에서도 작은 콩에 비교될 수 있는 작고 동그란게 쭈글쭈글 주름지어 있었다. 할머니께서 먹을 수 있다고 하셨으니 먹어봤다. 다 말라비틀어진 열매를 씹는 맛이 뭐 있으랴 하는데 희한하게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났다. 그 할머니 덕분에 먹게 된 그 열매는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벽오동을 알게 됐다. 이름에 오동나무가 들어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오동나무와는 근본 소속이 다르다. 오동나무는 현삼과이고 벽오동나무는 벽오동과이다. 벽오동나무는 잎이 오동나무 잎과 같게 생겼으나 나무껍질이 초록색으로 다르다 해서 벽오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실 잎만 닮았지 꽃이나 열매 모습은 전혀 다르다. 오동나무는 분홍색의 초롱꽃처럼 피는데 벽오동나무는 꽃잎도 없는 노란색 꽃을 피운다. 열매 모양도 전혀 다르게 생겼다. 가운데가 오목하게 휘어져 있는 나뭇잎처럼 생긴 것에 네다섯 개의 쭈글쭈글한 콩같이 작은 열매가 달린다. 열매는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간다. 나뭇잎처럼 돛단배처럼 생긴 것은 날개 역할을 한다. 그러다 적당한 때가 되면 쭈글쭈글한 열매는 껍질이 벌어지며 씨앗을 토해낸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열매를 먹어왔다. 열매를 볶아서 커피처럼 차로 마시기도 하고, 기름을 짜서 먹기도 한다.
추위에 약해 주로 전라도, 경상도 남부지방에 많이 살며 용인에서는 간혹 볼 수 있다. 중국이나 동남아 쪽이 원산이라 우리 숲에 자생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심어 가꾸는 정원수나 가로수로 많이 만난다. 그런데 북한지역의 황해도 해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벽오동나무 세 그루가 있다. 다행히 추위를 잘 견디고 있는 기특한 나무인 셈이다.
벽오동은 예전부터 봉황이 깃드는 곳이라 믿어 왔다. 그래서 경상도 지역에서는 벽오동과 봉황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 옛날 여수 오동도가 벽오동나무 숲으로 덮여 있을 때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심부름을 나온 사신 9명이 봉황으로 변해 하늘을 날던 중 오동도의 벽오동 열매를 따 먹으려고 내려왔단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기한을 넘겨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내려앉아 아홉 봉오리의 구봉산이 됐다고 한다. 처인구 원삼면의 구봉산과 이름이 같지만 내려오는 전설이 다른 것이 참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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