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아닙니다. 박각시입니다
- 입력 2021.11.03 09:20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 찬란한 햇살이 한올한올 세어지는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어느덧 가을은 막차의 출발을 앞두고 있어 더욱 아쉽다. 구절초가 피고 지고, 국화가 피고 지고 또 피어 가을엔 역시 국화밖에 없다는 듯 이곳저곳에서 독보적으로 마당을 장악하고 있다.
마치 스페인 플라멩코 치마의 화려한 레이스를 닮은 메리골드가 마당 한곳을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 메리골드 위로 갑자기 작은 새를 닮은 박각시가 들어왔다. 하던 일을 멈추고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빨강노랑 메리골드 꽃 사이로 보이지도 않는 엄청 빠른 날갯짓을 하고 있는 이 작은 박각시에 매료됐다.
처음 박각시를 보았을 때 ‘이게 말로만 듣던 그 벌새? 세상에서 제일 작은 새로 정지비행을 하며 빠른 날갯짓으로 꽃의 꿀을 빨아먹는다는 그 유명한 벌새일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곧 해결되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이에 대한 자료는 넘쳤다.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우리나라에 벌새는 없다. 벌새는 아메리카대륙에만 산다. 벌새처럼 보이는 것은 꼬리박각시 종류의 나방이다’라며 한풀 꺾여 실망한 듯한 논조의 정보들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신기한 벌새인가 하고 기대하다 기껏 나방이란 사실에 기분이 푹 가라앉고 만다.
이처럼 새와 나방의 존재 가치에 사람들은 많은 간격을 두고 있다. 더구나 ‘나방의 날개를 만진 손으로 눈을 비비면 눈이 먼다’라는 속설처럼 나방은 곤충계의 독버섯 같은 대우를 받아왔다.
옛날 <양들의 침묵>이란 영화의 포스터에 보면 연쇄살인마를 상징하는 얼굴에 입을 나방의 모습으로 덧붙여놓았다. 또 만화 손오공에서 보면 사오정이 입에서 나방을 내뿜어 독과 같은 무기로 사용한다. 이렇듯 사람들은 나방을 부정적인 느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오죽하면 나비는 전통적으로 각종 그림에 출연하는데 나방을 그린 작품은 많이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방 중에는 우리에게 아주 긍정적인 것들이 있다. 특히 누에고치로 유명한 누에나방이 있다. 나방이 번데기가 되기 위해서 만든 고치라는 번데기방을 우리는 실로 뽑아 비단이라는 아주 고급스러운 옷감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방을 뺏긴 번데기를 영양간식으로 먹어버리니 누에나방은 인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최근 플라스틱을 먹는 나방으로 유명해진 ‘꿀벌부채명나방’도 있다. 아직 상용화단계까지는 아니지만 극심해지는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해결해줄 실마리가 된 것 같아 정말 반갑다.
다시 벌새로 오해받은 박각시 얘기로 돌아가면, 주인공은 작은검은꼬리박각시로 주로 낮에 돌아다니며 꽃의 꿀을 빨아먹는다. 주둥이가 긴 대롱으로 생겼는데, 동그랗게 말고 있다가 꽃을 향해 뻗는다. 거의 몸길이에 맞먹는 길이의 주둥이를 가졌다. 빠르게 날아다니며 정지비행을 하듯이 꽃 앞에서 주둥이를 꽃에 꽂아 꿀을 빨아먹는다. 1초에 50회 이상 날갯짓을 한다니 너무 빨라서 날개가 잘 보이지 않는다.
처음 박각시를 접하게 된 것은 날개 달린 나방 모습을 한 성충의 모습이 아니라 엄청나게 크고 신기한 모습을 가진 애벌레들이었다. 종류에 따라 다양한 무늬와 색을 가졌다. 그러면서 박각시 종류의 애벌레일거라 추측하는 단서는 거의 손가락만큼 자라는 큰 몸집과 배 끝에 나있는 뿔이다. 몸 끝을 향해 살짝 구부려 나있는 뿔을 보면 이것이 박각시의 애벌레구나 알게 된다. 소나무잎 사이에서도 발견되고 고구마 밭에서도 많이 본다. 그리고 숲에서도, 집 앞 화단에서도 본다.
주홍박각시 애벌레는 마치 작은 뱀을 닮았다. 처음 보게 되면 깜짝 놀란다. 분명 뱀이라 하기엔 좀 짧다. 무늬는 영락없는 무시무시한 뱀이다. 그러나 이런 애벌레가 나중에 번데기가 되었다가 나방이 되면 아주 화려한 색감의 형광분홍색을 가진 주홍박각시가 된다. 필자가 보기에 분명 분홍색인데 이름은 주홍박각시라 처음에 박각시 이름을 외울 때 많이 헷갈렸다. 분홍박각시는 없다. 주홍박각시만 있을 뿐이다.
몸에 솔잎처럼 얇은 세로 줄무늬가 있는 솔박각시 애벌레는 소나무에서 발견된다. 솔잎을 먹고 산다. 그래서인지 솔박각시에게서 솔잎 냄새가 난다고 한다.
필자의 자녀는 어려서부터 박각시 애벌레를 좋아했다. 종류에 상관없이 박각시 애벌레를 보면 자기 손바닥만한 애벌레를 사랑스레 쓰다듬어주곤 했다. 말랑말랑한 촉감이 마치 젤리같다고 했다. 나방도 알고 보면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 > 생태칼럼-용인시민신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마 속을 거니는 자연산책 -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찾은 꽃 이야기 (0) | 2022.03.28 |
---|---|
가장 먼저 피는 꽃, 복수초 (0) | 2022.03.28 |
소설같이 소설(小雪)에 눈이 내렸다 (0) | 2022.02.05 |
사람과 공존하는 동막천과 탄천의 새들 (0) | 2022.02.05 |
동네 ‘산책’이 아이들을 키웠어요 (0) | 2022.02.05 |
댓글